
가격 변동성이 큰 외국산 백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고령층과 영유아, 면역저하자 등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백신 국산화’ 움직임이 속도를 내고 있다. 백신 개발 실패가 곧바로 중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지속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외국산 백신의 가격 변동성이 심화되면서 안정적 백신 공급망 구축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국내 제약사들의 백신 개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GC녹십자의 유전자재조합 탄저 백신인 ‘베리트락스주’를 허가했다. 베리트락스주는 탄저균의 외독소 구성 성분 중 하나인 방어항원 단백질을 활용해 유전자재조합 기술로 만든 백신이다. 방어항원은 인체 감염 시 탄저균에 의해 생성되는 독소 중 하나로, 탄저병 예방을 위한 주요 면역원으로 작용한다. 베리트락스주는 질병관리청이 주관하고 GC녹십자가 협력해 개발했으며, 유전자재조합 기술을 이용해 탄저 백신을 의약품으로 상용화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GC녹십자는 백신 사업 부문에서 연이어 성과를 올리며 ‘백신 주권’ 확립에 기여하고 있다. 수두 백신 ‘배리셀라’가 매출을 견인하고 있는 가운데 독감 백신 ‘지씨플루’ 역시 올해 태국에서 역대 최대 입찰·수주 물량을 기록했다. 지씨플루의 누적 수주량은 1500만 도즈를 돌파할 전망이다. 성인용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예방 혼합백신(Tdap)인 ‘GC3111B’에 대한 임상 1·2상 승인도 이뤄졌다. 식약처 관계자는 “베리트락스주 허가는 생물테러 감염병 예방 등 국가 위기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탄저 백신 자급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국산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플랫폼 확보를 위해 질병청이 추진하는 ‘팬데믹 대비 mRNA 백신 개발 지원사업’에도 선정됐다. GC녹십자는 지난 2019년부터 mRNA와 지질나노입자(LNP) 전담 연구팀을 신설해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으며, mRNA 생산설비에 대한 준비도 마친 상태다. GC녹십자는 올해 동물 비임상 시험 결과 확보와 임상 1상에 대한 임상시험계획(IND) 승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백신 명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국산 백신 연구개발(R&D)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지난 14일 식약처로부터 A형간염 백신 ‘NBP1801’의 임상 1상을 승인받았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지난 2018년부터 NBP1801을 개발해왔다. A형간염 백신은 독감 백신 등과 함께 대표적인 기초 백신으로 꼽힌다. 2015년부터 A형간염 백신은 국가필수예방접종(NIP) 항목에 포함됐으나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하브릭스’, 미국 머크(MSD) ‘박타’, 프랑스 사노피 파스퇴르 ‘아박심’ 등 외국계 제약사 백신이 주도하고 있다.
LG화학은 정제 백일해 기반 6가 혼합백신 ‘LR20062’을 개발 중이다. LR20062는 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소아마비, B형헤모필루스인플루엔자, B형간염 등 6개 감염증을 예방하는 백신이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5가 백신과 B형간염 백신 조합 대비 접종 횟수를 6회에서 4회로 2회 줄인 것이 특징이다. 현재 임상 2상 단계로 2030년 국내 허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백신 전문 기업들의 약진도 계속되고 있다. 진매트릭스는 최근 A형간염 백신 ‘GMAI-02’의 국내 임상 1상 IND를 승인받았다. 동물 효력시험에서 GMAI-02의 A형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가 기존 상용 백신 대비 약 1.6배 높았고, 감염 방어시험에서도 바이러스 방어 효력을 확인했다. 진매트릭스는 향후 임상시험에서 A형간염 병력과 백신 접종력이 없는 만 19~55세 사이의 건강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안전성, 내약성, 면역원성을 평가할 계획이다.
차백신연구소는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 ‘CVI-VZV-001’의 국내 1상 임상시험에서 내약성과 안전성을 확인했다. CVI-VZV-001은 차백신연구소가 자체 개발한 면역증강제 플랫폼 ‘리포-팜(Lipo-pam)’을 적용한 재조합 대상포진 백신이다. 대상포진은 바이러스가 수두 등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의 신경질에 숨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재발하는 병으로, 현재 약독화 생백신과 재조합 백신 등 두 가지 형태의 예방백신이 상용화돼 있다. 차백신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톱라인(주요 결과)을 바탕으로 올 3분기 중 임상시험 결과보고서(CSR)를 수령하고 연내 2상 IND를 제출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외국 백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효과적인 감염병 대처를 위해선 반드시 국산 백신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업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코로나19를 겪으며 국내에서도 백신 주권의 중요성이 높아졌다”며 “안정적인 백신 공급망 구축은 국가의 필수적인 책무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꾸준한 지원과 민간의 기술 혁신이 맞물려야 진정한 백신 주권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연구개발의 리스크를 감수하는 기업들을 위한 정부의 장기적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