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안치현 여성전공의수련국 이사(대한전공의협의회)
[쿠키 건강칼럼] 병원에서의 의료진의 생활은 드라마 소재로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여러 의학 드라마에서 전공의와 그 상급자 간의 모습은 대부분 뚜렷한 상하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적 필요에 따라 절대복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전공의들과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수의 모습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정도의 과장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의학 드라마에서 전공의와 그를 둘러싼 상하관계는 실제 관계를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이 수직적 관계는 드라마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문제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전공의에 대한 성폭력 문제다.
여성 전공의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조사한 자료들을 살펴보자. 2010년 한국여자의사회에서 여성전공의 38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성추행을 ‘가끔' 혹은 '자주' 경험한 경우가 약 20%였으며 그 가해자는 교수/전문의, 상급전공의, 동료전공의 순이었다.
이로부터 약 5년 뒤 2015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시행한 '전공의 수련 및 근무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에 참여한 여성전공의 544명 중 약 24%가 성추행을 겪은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이 조사에서도 가해자는 환자를 제외하면 교수, 상급전공의, 동료 순으로 나타났다. 전공의의 수련기간은 인턴 수련기간을 합산하면 4년 혹은 5년으로 2010년 한국여자의사회의 조사자료의 응답자와 2015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조사자료에서의 응답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공의들에 대한 성폭력은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전공의에 대한 성폭력이 많은 피해자를 그것도 동일한 형태로 재생산한다는 통계는 그간 전공의에 대한 성폭력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들이 실패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공의 대상 성폭력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온 문제이지만 해결은 아직 요원하다.
병원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할 경우에 발생하는 일차적 난관은 문제제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공의에게는 성폭력이 발생했을 시 즉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창구가 마련되어있지 않다.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어떤 곳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지, 받을 수 있는 도움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가해자는 이전의 조사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 병원 내 상급자가 대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병원의 수직적 관계와 폐쇄적인 분위기는 해당 가해자가 지속적,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이 연대하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설령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더라도 그 이후 과정 역시 험난하다. 가해자들은 보통 해당 진료과 혹은 병원 내에서 피해자 자신을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병원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단계조차 '현실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기 일쑤다. 좁고 폐쇄적인 병원 사회에서 문제제기 이후 해당 사은 가십으로 다루어지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평소 말투, 옷차림, 대인관계, 소위 행실에 대한 폭력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지속적인 2차 가해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잠깐 잘잘못이 밝혀지고 벌을 받을 것 처럼 보였던 가해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혹은 그 조차 받지 않은 채 다시 돌아와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슬프게도 많은 선례들로 증명된다.
대부분 구성원들이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그래서 결국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포기하고 그 끔찍한 순간들을 감내하고 마는 것이다.
전공의 대상 성폭력은 성평등의 영역에서 정립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고 합을 맞춰가는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협소하고 확실한 의미에서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전공의 수련환경은 아직 법률로 명확히 규정된 범죄로부터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지난 수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만한 수차례의 사건이 있었음에도 전공의에 대한 성폭력은 해결되지 못했고 계속해서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는 성폭력에 대한 적절한 대응수단이 없다.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고, 적절한 대응수단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