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안기종(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
[쿠키 건강칼럼] 차비를 내지 않고 차를 타는 것을 한자성어로 ‘무임승차(無賃乘車)’라고 한다. 무임승차를 하는 손님 입장에서는 이 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국내 개발신약 약가우대 정책’에 대부분의 신약을 개발하는 다국적 제약사가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보건복지부가 올해 3월 2일 임상적 유용성이 기존 약제와 유사한 국내 개발 신약이 일정한 요건을 충족할 경우 대체약제의 최고가까지 인정해 주는 ‘국내 개발신약 약가우대’ 정책을 추진한다고 발표하였을 때만 해도 다국적 제약사의 ‘무임승차’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가 ‘국내 개발신약 약가우대’ 요건으로 제시한 “첫째,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를 받은 신약 또는 이에 준하는 신약. 둘째,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1상 또는 2상 또는 3상)을 국내에서 수행한 경우. 셋째, 최초 허가국 외 1개국 이상에서 허가 또는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경우. 넷째, 혁신형 제약기업 또는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이에 준하는 제약기업으로 인정하는 기업이 개발한 경우.” 등 4가지 요건 모두를 다국적 제약사는 절대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4개월 후인 지난 7월 7일 보건복지부는 제약사가 신약의 비용효과성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대체약제 최고가의 10%를 가산하고, 만일 비용효과성을 입증하면 혁신가치를 경제성 평가에 반영해 더 높은 약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우대 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우대’ 요건으로 제시한 내용들이 지난 3월 2일 발표한 ‘국내 개발 신약 약가우대’ 요건보다 대폭 완화되어 다국적 제약사도 손쉽게 수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보건복지부가 국내 보건의료 기여도가 높고, 임상적 유용성을 개선한 ‘글로벌 혁신신약의 약가우대’ 요건으로 첫째,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신약으로 한정하지 않고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신약이 아니더라도 국내에서 생산 또는 사회적 기여도(환자치료 지원사업, 기부금 등) 등을 고려하여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인정한 경우로 완화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신약이 아니더라도 해당 제약사가 환자치료 지원사업을 하거나 기부금 등을 내는 방법으로 사회적 기여를 하면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신약’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을 국내에서 수행한 경우 이외에 해당 품목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을 국내를 포함하여 실시한 경우도 포함시켰다. 셋째, 다국적 제약사가 충족하기 어려운 최초허가국 외 1개국 상에서 허가 또는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경우 요건은 아예 삭제하였다.
넷째, 혁신형 제약기업·준하는 기업이 개발한 경우로 한정하지 않고, 혁신형 제약기업·준하는 기업이 개발하지 않았더라도 국내 제약사와 외자사 간 공동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인정한 기업이 개발한 경우도 포함하도록 하였다.
결론적으로 보건복지부가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우대’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3가지 요건은 국내 제약사 뿐 만 아니라 다국적 제약사도 조금만 준비하면 충족할 수 있고, 그 결과 다국적 제약사도 최소 10% 이상의 약값을 더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부가 추진 중인 ‘국내 개발신약 약가우대 정책’에 글로벌 혁신신약을 개발하는 다국적 제약사가 ‘무임승차’를 한 꼴이다.
다국적 제약사는 그동안 글로벌 혁신신약의 가치가 한국에서 약가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이런 와중에 글로벌 혁신신약의 약값이 최소 10% 이상 인상되면 그것이 그대로 순수익이 되어 다국적 제약사는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된다.
현대 제약기술의 발전으로 최근에는 항암제 뿐 만 아니라 에이즈 치료제, C형간염 치료제 등 효과와 부작용에 있어서 혁신적 또는 획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약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일명, ‘혁신신약이다. 이러한 ‘혁신신약’은 개발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약값이 비싸다. 그리고 주로 다국적 제약사가 개발한다.
최근 이러한 ‘혁신신약’ 개발에 있어서 큰 변화가 생겼다. 국내 제약사도 ‘혁신신약’을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9년 SK케미칼이 개발한 ‘선플라주’를 시작으로 지난 17년 동안 총 27개의 국내 개발 신약이 출시되었다. 문제는 출시된 국내 개발 신약 대부분은 효과와 부작용에 있어서 ‘혁신신약’이라고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난 5월 13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시판허가를 받은 한미약품 개발 신약인 폐암 표적항암제 ‘올리타정’이 작년 12월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으로부터 국내 개발 항암제로서는 처음으로 혁신치료제로 지정되었지만 효과와 부작용면에서 과연 ‘혁신신약’이라고 할 수 있을지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2001년 우리나라에서 출시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세계 최초의 표적항암제로 5년 생존율은 95%가 넘는다. 올해 출시된 만성C형간염 치료제 ‘하보니’의 3개월 후 완치율도 95%를 넘는다. 이 정도의 치료효과는 나와야 ‘혁신신약’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파격적인 약가우대 혜택을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글로벌 혁신신약’ 기준을 “국내 보건의료 기여도가 높고, 임상적 유용성을 개선(‘비교 약제 대비 효과 개선을 보인 경우와 비교 약제 대비 효과가 비열등하되, 안전성, 편의성 등의 개선에 대해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인정한 경우’)한 신약”으로 규정하고 있다. 효과가 조금 개선된 경우와 효과 개선은 없고 안전성, 편의성 등의 개선만 있는 경우 국내 제약사 뿐 만 아니라 다국적 제약사의 약값을 최소 10% 이상을 가산한다는 것은 과한 혜택이다.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업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건강보험 약가제도 개선 협의체’를 구성해 전체회의 및 실무회의, 현장 간담회 등을 개최한 후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우대 정책’ 개선안을 마련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협의체 논의 과정에서 시민단체·소비자단체·환자단체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특히, 앞으로 막대한 건강보험 재정 투입이 예상되는 이번 ‘글로벌 혁신신약의 약가우대 정책’ 추진에 있어 최소한의 사회적 논의구조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지 않고 단순히 보고만 하는 것도 심각한 절차적 하자에 해당한다.
‘글로벌 혁신신약의 약가우대 정책’은 우리나라 건강보험 약가제도의 큰 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정책이고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다수의 논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시민단체·소비자단체·환자단체, 전문가 등과 사회적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