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건강칼럼]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일명, 예강이법) 도입운동이 시작되었다.
2014년 1월경 초등학교 3학년 전예강 양은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지 7시간 만에 사망하였다. 유족은 형사고소나 민사소송을 제기할 마음은 없었으나 진실을 알기 위해 의사 2명, 현직검사 1인, 의료전문변호사 1명, 소비자권익위원 1명으로 구성된 ‘5인 감정부’의 전문 감정을 받을 수 있는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해당 대학병원의 거부로 조정신청은 각하되었고, 유족은 부득이 원하지 않았던 민사소송을 1년 8개월째 진행 중이다. 병원 앞에서 ‘진실규명 및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 도입’을 위한 릴레이 1인 시위도 몇 달간 전개하였다. 병원 앞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도 두 번이나 개최하였다. 조만간 형사고소도 할 예정이다.
예강이 유족은 공식 페이지(http://iamyekang.tistory.com)를 개설해 이러한 모든 활동을 공개해 놓았다. 2016년 2월 22일 기준 공식 홈페이지 방문자가 113,885명을 넘었고, ‘예강이법’ 제정을 위해 9,032명이 온라인 서명을 하였다.
만일 의료분쟁 조정절차가 상대방의 부동의 또는 14일간 무응답으로 각하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하, 의료분쟁조정법)상의 독소조항(제27조제8항)이 없고 자동개시제도가 도입되어 있었다면 예강이 유족과 해당 대학병원은 지난 2년 동안 깊은 갈등과 상처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진] 또 다른 예강이가 나오지 않도록 예강이 부모는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일명, 예강입법) 도입운동을 전개하였다(출처: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예강이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하였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2월 17일 전체회의를 개최해 ‘사망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상해’ 의료사고 발생 시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의료분쟁 조정절차가 자동개시 되도록 의결하였다. 만일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와 국회 본회의 그리고 국무회의를 거쳐 공포될 경우 6개월 이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대한의사협회, 의사회 등 의료계에서는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를 도입하면 조정신청이 남용되어 의료기관에 과도한 행정적 부담을 주고, 의사가 의료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방어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며 반대 성명을 릴레이로 발표하며 법제사법위원회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구제제도 중에서 상대방이 거부하거나 14일 동안 무응답 한다고 조정신청을 각하하는 제도를 운영 중인 기관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유일하므로 언론중재위원회, 환경분쟁조정위원회, 한국소비자원 등 타 분쟁조정제도 운영기관과 동일하게 조정신청이 있으면 자동으로 조정절차가 개시되도록 의료분쟁조정법(제27조제8항)을 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소비자단체에서는 헌법재판소에 의료분쟁조정법 제27제8항 대상으로 법령헌법소원을 제기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예강이법 반대 목소리 내는 의료계의 반응이 당황스럽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의 적용범위를 ‘사망’으로 한정해야 되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상해’로 확대한 것에 대해 졸속입법, 방어진료, 포퓰리즘 등 자극적인 단어까지 사용하며 반대하고 있다. 환자단체로서는 이러한 의료계의 반응이 당황스럽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18대 국회에서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 포함되어 있던 ‘입증책임 전환’ 규정이 의료계의 반대로 삭제되면서 대신 의료사고 피해자의 입증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해 도입된 기관이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핵심기능은 전문적이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감정을 위해 도입된 ‘5인 감정부’ 등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소비자단체·환자단체는 정부와 국회에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나 ‘5인 감정부’ 등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오직 의료과실의 입증책임을 의료사고 피해자가 아닌 의료인이 부담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따라서 입증책임 전환규정 대신 도입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상대방이 거부하거나 14일간 무응답 시 조정신청이 각하되는 악법규정으로 의료사고 피해자가 신속하고 공정한 피해배상을 받을 수 없다면 합리적으로 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개원한 이래 총 5,487건의 조정신청 중 43.2%에 해당하는 2,342건만이 개시되었고, 3,077건은 상대방의 부동의 또는 14일간 무응답으로 각하되었다. 즉,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인 조정신청자의 56.8%가 의료분쟁조정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정도 성적이면 ‘의료분쟁조정중재원 무용론’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하다.
의료분쟁조정법이 19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될 상황에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의 적용범위를 ‘사망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상해’로 제한한 절충안이 보건복지위원회를 전격 통과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망’ 의료사고의 경우 의료분쟁조정중재원보다는 법원을 선호하고, 유족이 장례를 치르거나 조정절차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의료기관이 채무부존재확인 형태로 먼저 조정신청을 제기할 우려도 있고, 전체 의료사고 비율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료분쟁조정제도 이용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핵심이 ‘중상해’ 의료사고다. 따라서 의료사고 피해자 입장에서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의 적용범위와 관련해서는 ‘사망 또는 중상해’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의료분쟁은 의료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
의료사고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평균 500만 원 이상의 변호사 비용과 인지대·송달료 등 고액의 소송비용이 필요하다. 패소하면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야 한다. 1심만 평균 2년 6개월이 걸리고, 2심을 거쳐 대법원 판결까지 받으면 5~6년은 족히 걸린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행위에 있어서 비전문가인 피해자가 의료인의 과실 을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의료사고 피해자 중에는 고액의 소송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의료사고 개연성이 있음에도 민사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경우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조정제도 문을 두드리지만, 의료기관이 동의하지 않으면 각하된다. 이에 분노한 피해자들은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형사고소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 앞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다가 업무방해죄와 명예훼손죄로 형사고소 되어 전과자가 되기도 한다. 의료인이 형사고소를 당하면 실제 형사처벌을 받기도 하고, 검찰에서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도 수사기관 조사와 법원 재판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 2011년 4월 8일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개원하였다.
자동개시 요건인 ‘중상해’의 판단기준은 가급적 넓혀야 한다.
‘중상해’ 개념은 형법, 교통사고처리특례법 등에 규정된 ‘법률적 용어’이기 때문에 판단이 가능하고 이를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의 요건으로 하는 것도 가능하다. 중상해의 구체적 범위에 대해서는 대통령령 개정 시 의료계와 시민·소비자·환자단체가 함께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합리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중상해’의 판단기준이 확정되면 의료사고 피해자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하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우선 상대방에게 조정 참여의사를 묻는다. 상대방이 동의하면 사망·중상해·경상해 구분 없이 모두 조정절차를 진행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망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한 중상해’에 해당하는지 판단을 한다. 사망 또는 중상해에 해당되면 조정절차를 진행하고, 해당되지 않으면 조정신청을 최종적으로 각하하면 된다.
다만, ‘중상해’의 범위를 대통령령으로 포괄 위임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기 때문에 법제사법위원회는 형법 제258조와 동일하게 “생명에 대한 위험 발생, 불구, 불치나 난치의 질병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상해”로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대검찰청은 2009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제4조 제1항 판단 시 중상해에 대한 ‘일반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중상해’를 ‘생명에 대한 위험, 불구, 불치 또는 난치의 질병’으로 구분하고,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위험’은 ‘인간의 생명 유지에 불가결한 뇌 또는 주요 장기에 대한 중대한 손상’을 말하고, ‘불구’는 ‘사지 절단 등 신체 중요부분의 상실ㆍ중대변형 또는 시각ㆍ청각ㆍ언어ㆍ생식 기능 등 중요한 신체 기능의 영구적 상실’을 말하고, ‘불치나 난치의 질병’은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중증의 정신장애, 하반신 마비 등 완치 가능성이 없거나 희박한 중대 질병’을 예시로 들고 있다.
그러나 중상해의 범위를 대검찰청의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의 중상해 판단기준과 같이 엄격하게 판단할 경우 자칫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피해구제 범위가 대폭 줄어들 우려가 있다. 따라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 적용범위를 의료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망’으로 제한한다거나 ‘사망에 준하는 중상해’로 매우 엄격하게 규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
사회적 논의를 거쳐 ‘중상해’의 범위를 가급적 넓혀 사망 또는 중상해 의료사고를 당한 피해자나 유족들도 소액의 비용으로 3달~4달의 단기간 내에 의사 2명, 현직검사 1인, 의료전문변호사 1명, 소비자권익위원 1명으로 구성된 ‘5인 감정부’의 전문 감정을 받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의 적용범위가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