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자사주 소각 의무화 도입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상장사들의 발 빠른 처분 사례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이를 두고 소액주주 권익보호는 외면한 채 경영권 보호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달 들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공통적으로 기업이 자사주를 신규 취득할 경우 원칙적으로 소각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행 상법은 지난 2011년 개정 이후 자사주 취득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반드시 소각하도록 하는 규정이 없어 자사주가 본래 취지와 달리 대주주 지배력 강화,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악용되는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현재 국회에 접수된 자사주 소각 관련 상법 개정안은 소각 시한이 다를 뿐 전체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상장사가 자사주를 취득하면 즉시 소각하게 의무화 했다. 아울러 법 시행 전 상장사가 보유한 자사주는 6개월 이내 소각으로 규정했다. 법 공포가 6개월 뒤인 점을 감안하면 기존 자사주 보유 기업에는 최대 1년의 유예 기간을 준다.
김남근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개정안은 자사주를 취득 후 1년 이내 소각하도록 명시했다. 민병덕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개정안도 소각 시한은 동일하나, 취득 당시 자사주 총수가 발행주식총수의 100분의 3 미만인 경우 그 기한을 2년으로 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 등이 발의한 개정안은 자사주 취득일로부터 6개월 이내 소각을 의무화했다. 발의된 개정안들은 임직원에 대한 보상 등 예외적일 때에 한해 자사주를 보유할 수 있도록 각각 규정했다.
문제는 소각 의무화 움직임에 상장사들의 예외적인 자사주 처분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임직원 보상 및 복지 목적, 주식매수선택권 행사에 따른 교부 등 통상적 목적 외에 자사주를 처분하는 사례들이다.
지난 6월3일 대선 이후 이달 22일까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가운데 자사주를 처분한 사례는 △세방 △인지컨트롤스 △환인제약 △일정실업 △태광산업 △롯데지주 △SK이노베이션 △모나용평 등이 있다.
자사주 처분 유형별로 보면 태광산업과 SK이노베이션, 모나용평은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를 발행했다. 세방은 계열회사가 아닌 거래관계사에 자사주를 처분했다. 나머지 상장사는 개인 최대주주 및 계열회사 처분(인지컨트롤스), 국내 투자자 처분(환인제약), 시장 매도(일정실업), 계열회사 처분(롯데지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회사가 밝힌 처분 목적은 △사업협력 강화(세방) △재무구조 개선 및 종속회사 지배력 강화(인지컨트롤스) △유통주식수 증가를 통한 거래 활성화 및 운영자금 확보(환인제약) △주식 유동성 확대 및 자금조달(일정실업) △사업구조 재편 및 성장위한 기업 인수·설립 추진(태광산업) △재무구조 개선(롯데지주) △SK엔무브 취득 자금 조달(SK이노베이션) △운영자금(모나용평) 등이다.
투자업계는 실질적인 처분 목적이 지배력 강화라는 점을 지적한다. 일례로 인지컨트롤스는 자사주 4.05%를 최대주주인 정구용 인지그룹 회장과 비상장 그룹 계열사 유텍솔루션에 처분했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유텍솔루션은 정 회장과 자녀 세 명이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한 가족회사”라며 “인지컨트롤스는 자사주 처분 목적에 대해 ‘재무구조 개선 및 종속회사 지배력 강화를 위한 처분’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일부 상장사가 단행한 교환사채 발행 움직임을 두고 일종의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현시점에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것은 소액주주 권익 보호와 동떨어지는 일종의 우회 전략으로 보인다”라며 “공표된 상법 개정안에 담긴 이사의 주주충실 의무에 대한 위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자사주 소각 의무화 도입과 함께 기업 경영권 방어를 위한 조치도 이뤄져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이 실장은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도입 검토나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취득한 자사주에 한해 소각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라며 “이는 입법 과정에서 진행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실제로 기업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입법 도입도 나타나고 있다. 최은석 국민의힘 의원은 22일 이같은 취지의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신주인수선택권 제도 도입,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 허용, 경영 판단의 원칙 명문화 등이 담겼다. 최 의원은 “기업 경영권이 위협받으면 장기 투자 전략과 경영 비전이 흔들리고, 이는 곧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기업의 혁신과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상법 체계를 보다 균형 있게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