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 현장에서 일회용 치료재료의 사용량이 급증하는 가운데, 환경 오염과 의료비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전문가들은 일회용 기구의 재사용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 내시경 관련 의료폐기물만 매년 수천 톤이 발생한다. 재활용이 가능한 기구들조차 아무 대책 없이 버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석환 대한수술감염학회장은 4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주최해 서울 역삼 포스코타워에서 열린 ‘안전한 치료재료 재처리 도입 공동 심포지엄’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우리나라는 매년 약 10%씩 의료폐기물 배출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소각하면서 발생하는 탄소와 온실가스 배출량도 급증하고 있다. 종합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이스라엘, 일본 등 해외 각지에서는 일회용 치료재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처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비용 절감과 환경 보호를 동시에 관리하고 있다. 재처리는 단순 소독을 넘어, 재사용할 의료기구의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세척·멸균에 이어 기능적·기술적 성능을 복원하고 검증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국내에는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에 관한 법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이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공인 재처리 기업조차 부재한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일회용 치료재료 재처리에 대한 연구는 이어졌다. 지난 2009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진단 및 치료재료의 재사용 원칙에 관한 연구’를 통해 “미국 FDA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엄격한 기준과 체계적 관리를 전제로 한다면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11년 심사평가원의 연구에서도 “국내에 일회용품 재처리 제도를 법적으로 마련하면 환경, 건강보험 재정, 산업 발전 측면에서 모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결론이 나왔다. 다만 환자 안전에 대한 우려, 윤리적 갈등, 산업계의 반발 등으로 인해 실질적 법제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 회장은 재처리가 가능한 일회용 치료재료를 구분하고, 이에 따른 품질관리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재사용 안전성과 효율성에 대한 근거는 충분히 축적돼 있다”며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재처리 절차와 관리 기준, 사후 점검 체계를 포함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 현장에서도 재사용을 위한 법적 근거와 표준화된 절차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병원중앙공급간호사회가 지난해 실시한 중앙공급실 운영 실태조사에 따르면, 의료기기를 재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5단계 세척 과정을 모두 이행하는 의료기관은 전체의 14%에 불과했다. 자동세척기, 초음파세척기, 카트세척기를 보유한 기관의 비율도 각각 20%, 61%, 69% 수준에 그쳤다.
복강경 수술과 로봇수술 등 최소침습수술(MIS)이 일상화되면서, 사용 기구와 재처리해야 할 물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기구 특성상 넓은 작업 공간과 충분한 건조·멸균 시간이 필요한데도 숙련 인력과 설비가 부족하다. 수술기구 재고 역시 충분치 않아 현장에서는 수술시간에 맞추기 위해 기구를 손세척하거나, 즉시 사용 가능한 스팀멸균을 택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즉시 스팀멸균은 건조 과정이 미흡해 수술 부위 감염 위험을 1.5배 이상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노연호 병원수술간호사회 학술이사는 “재처리 과정의 표준화와 전문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품질 관리에 한계가 있다”며 “감염관리 기준이 점점 엄격해지면서 일회용 기기를 선택하는 의료기관은 대폭 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수술실에서만 병원 전체 폐기물의 21~30%가 발생한다”며 “환경오염은 물론 재료비, 의료비 증가의 악순환이 일어난다”고 짚었다.
노 이사는 안전하고 체계적인 치료재료 재사용을 위해 별도의 수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재처리 수가를 신설해 의료기관이 시설과 장비, 전문 인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수행할 전문 재처리 기관을 육성해야 한다”며 “제조사들이 폐기물을 줄이고 재처리가 용이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부는 일회용 치료재료 재처리의 제도화 필요성에 공감하며, 관련 부처 간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최수경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혁신센터장은 “치료재료 비용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재처리 제도의 도입 필요성에 대해 정부 내부에서도 공감대가 상당하다”며 “다만 감염 위험에 대한 우려가 크고 적절한 사후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과 일본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재사용 가능한 범위는 제한적일 가능성이 높다”며 “재사용 횟수와 비용 보전 방안 등을 추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부처 간 협의를 통해 합리적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