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넘게 이어진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이 대통령 파면, 의과대학 모집인원 동결이라는 초강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전공의는 하반기 추가 모집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수업을 거부하는 의대생들은 유급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태가 이대로 이어질 경우 차기 정부가 의료정책 과제와 의대생·전공의 복귀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게 될 전망이다.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덜기 위해 현 정부가 최대한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의료계는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철회를 요구하며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박민수 차관,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등 강경한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가 내년도 의대 정원 동결이라는 양보안을 내놓았지만, 커질 대로 커진 갈등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고 있다.
전국 40개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이날까지 수업에 복귀하지 않는 의대생들에 대해 유급 처리를 하기로 하면서 대규모 유급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17일 기준 40개 의대 평균 수업 참여율은 26%에 그쳤다. 4명 중 3명은 수업을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마다 학칙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전체 수업일수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 이상 결석하면 유급 처분하고, 유급이 2~4회 누적되면 제적된다. 의대의 경우 한 과목에서 F학점(낙제점)을 받으면 유급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대로라면 의대 본과 4학년은 의사국가시험(국시) 실기시험 응시가 불가하다. 본과 4학년보다 개강 시기가 늦었던 예과 1~2학년과 본과 1~3학년은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 유급시한이 도래한다. 의대는 학년제로 수업이 돌아가기 때문에 이번 학기 유급 시 다음 학기는 자동 휴학 처리된다. 이번에 유급되면 24·25학번은 내년에 들어올 26학번과 함께 1학년 수업을 받게 되는 ‘트리플링’에 빠지게 된다.
트리플링이 발생하면 사실상 의대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게 의료계의 공통된 견해다. 한 수도권 의대 교수는 “세 학번의 동시 수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트리플링으로 인해 의학 교육의 질이 심각하게 저하될 뿐만 아니라, 병원 실습 역시 큰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대 교육 정상화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교육부가 의대 학생회 대표 조직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에 대화를 요청했지만,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교육부는 출입기자단 메시지를 통해 “의대협이 교육부의 간담회 제안에 대해 5월1일 또는 2일 중 간담회를 갖자고 했다”며 “학생들이 30일자로 복귀를 결정하는 데 있어 5월2일 만남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의대협에 만남을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교육부와 대학 측이 “올해 학사 유연화 조치는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 의정 관계는 경색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양새다. 교육부는 이날 의대 학장단과 만나 향후 계획과 수업 복귀생 보호 방안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현재 수업에 참여 중인 학생들의 학사일정을 어떻게 운영할지, 이들이 수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대규모 유급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내년 1학년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다.
의정 갈등 장기화는 의료인력 공백과 지역·필수의료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에 차기 정부의 조정 능력과 정치적 결단이 사태 정상화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다만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어긋난 의정 관계를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종훈 고려의대 정형외과 교수는 “의대 2000명 증원 문제는 교육부가 철회하면서 사라졌지만, 복지부의 4대 의료개혁 정책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고,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4대 개혁을 없던 일로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특히 더불어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 4대 개혁 수정안 추진과 함께 공공의대 설립을 밀어붙일 텐데 이 경우 의료계의 반발은 극심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각 대선 캠프에선 공공의료 강화를 비롯해 필수·지역의료 활성화 등 다양한 보건의료 의제가 제시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합리화를 핵심으로 한 의료 공약을 발표하며, 의료 접근성 격차를 해소하고 공공의료 인프라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들은 공공의대 신설에 거리를 두고 의료계와의 합의를 바탕으로 의정 문제를 돌파하겠다고 나섰다.
박 교수는 “공공의대 설립 문제는 의대 증원 만큼 의료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라며 “민주당이 4대 개혁을 포기하더라도 공공의대라는 더 큰 변수가 남아 있는 만큼 차기 정부에서 의정 갈등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심화할 수 있다”라고 짚었다. 이어 “현재로선 답이 없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든 국민의힘 정권이 들어서든 의정 갈등이 깔끔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 “현 정부는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 구성을 확정해 본격 출범시켜야 한다”고 피력했다.
차기 정부에서 의정 갈등의 매듭이 풀릴 수 있도록 현 정부의 의료정책 추진 당사자들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황규석 서울시의사회장은 “국민 생명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의료시스템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든 현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처음부터 정책을 무책임하게 추진했고, 정권 마무리 단계에서도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짚었다. 황 회장은 “새 정부는 전 정부와 다른 형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며, 정부와 의료계가 함께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