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출발선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인터넷전문은행 토스뱅크는 ‘KRWTBK’ 등 48건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권을 지난 26일 출원했다. 토스뱅크 관계자는 “시장 흐름과 가능성을 검토하는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상표를 출원했다”고 밝혔다.
KB국민은행은 KBKRW, KRWKB 등 17개 상표를 2개 상품분류로 나눠 총 32건 상표권을 지난 23일 출원했다. 하나은행과 카카오뱅크도 스테이블코인 관련 명칭을 출원했다. 은행권은 현재 합작법인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공동 발행하는 사업 모델을 구상 중이다.
국내 대표 빅테크 기업도 주도권 경쟁에 불을 지폈다. 앞서 카카오페이는 지난 17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암시하는 명칭의 상표권 18건을 특허청에 출원했다. 박상진 네이버페이 대표는 최근 ‘Npay 미디어데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정책 도입에 빠르게 발맞추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상표권 출원만으로도 과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상표 출원 이후 주가가 급등한 카카오페이는 지난 24일과 26일 한국거래소에서 거래가 정지됐다. 국민은행과 과거 업무협약(MOU)을 맺은 어댑터토큰(ADP) 코인은 빗썸에서 하루 만에 약 25% 상승했다. 카카오 테마 코인 카이아(KAIA)는 지난 9일부터 약 2주 동안 96%가량 폭등했다.
그러나 시장의 기대와 달리 발행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규제 문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을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지난 10일 처음 발의됐다. 기본법 제정 외에도 전자금융거래법, 자본시장법, 외국환거래법, 특정금융정보법 등 관련 법령의 정비도 뒤따라야 한다. 법적 기반을 마련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최근 스테이블코인이 일종의 ‘열풍’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부나 금융당국 차원에서 발행 구조나 주체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며 “스테이블코인 관련 소식이 나오기만 해도 코인이나 주가가 급등하는 등 과도한 기대가 형성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외 기관들을 중심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 안착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25일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 대규모 인출 사태(뱅크런)와 비슷한 ‘코인런’이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법정화폐와 1:1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대량 상환 요구 시 국채 등 준비자산을 급히 매각해야 하는 구조인 만큼, 금융시장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중앙은행 입장에선 자본 유출 가속화로 통화정책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 요인이다. 원화 기반 코인이 유통되면 해외 스테이블코인과의 교환이 쉬워질 경우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고, 통화정책의 실효성이 약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자국 통화 신뢰도가 낮은 신흥국에서 달러 연동형 스테이블코인의 사용이 급증하면 자국 통화의 주권이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 자문위원을 지낸 미국 UC버클리의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 역시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스테이블 코인을 제도화하면 수천 개 미국 기업에 자체 화폐 발행을 허용하는 셈”이라며 신뢰를 잃은 일부 코인의 가치 하락이 연쇄적인 환매 사태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지난 2023년 스테이블코인 USDC 개당 가격은 예치금을 일부 보관해 놓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자 1달러에서 87센트까지 폭락했다.
또 다른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완성도 있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가 쉽지 않아 보인다”면서 “향후 국회와 금융당국이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쳐 제도적 완성도를 높여야, 정부가 추진하는 ‘원화 주권 확보’와 한국은행이 우려하는 통화정책 훼손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