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69)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69)

빈센트의 <분홍 과수원>, 모베에게 준 <분홍 복숭아 나무>
8월 11일부터 하나투어와 함께 하는 '13일의 유럽 예술여행'

기사승인 2025-05-19 09:00:04
빈센트 반 고흐, 분홍 과수원, 1888, 캔버스에 유채, 64.5x80.5cm, 반 고흐 미술관

아를의 찬란한 빛은 온 세상을 눈부신 색채로 감싸 안았다. 빈센트는 만개한 과수원과 풍요로운 수확의 순간을 화폭에 담으며 자연을 작품의 중심에 놓았다.

그가 아를에 첫발을 디뎠을 때는 눈이 내리는 2월이었다. 하지만 몇 주 후, 아를의 나무들은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과수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통해 봄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그려냈으며, 모네처럼 연작을 통해 활짝 핀 과수원의 정취를 표현했다.

빈센트의 <꽃피는 과일나무> 연작은 나의 어린 시절을 따스하게 감싸는 기억의 조각이다. 햇살이 부서지는 사과 과수원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나의 추억도 가볍고 자유롭게 흩날린다.

할아버지의 과수원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웃음과 이야기, 그리고 순수한 행복이 피어나는 작은 세계였다. 철봉처럼 매달린 가지는 어린 날의 모험심을 키워주었고, 그네와 널뛰기는 하늘을 향한 꿈을 품게 했다. 잡초마저도 소꿉장난의 반찬이 되어, 모든 것이 놀이가 되던 그 시절의 마법을 완성했다.

빈센트의 붓끝에서 피어난 꽃나무처럼, 나의 기억도 따뜻한 색채로 물들어 있다. 그 순간들은 바람에 실려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언제든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린 사과를 솎아내거나, 봉투를 씌우고, 사과를 따는 일꾼들을 위해 새참은 언제나 필요했다. 구수한 멸치 육수를 내고, 국간장에 마늘과 파를 송송 다져 넣고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 고추가루를 푼 양념 간장은 잔치 국수의 맛을 결정하는 키포인트다.  

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잔치국수, 그 따뜻한 기억 속에서 오랜 풍경이 펼쳐진다. 갓 삶아진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탄력 있게 감기고, 소쿠리에 담긴 모습은 식모할머니의 손길과 함께 정겹게 빛났다.

과수원 길은 끝없이 이어질 듯 아득했지만, 그 길을 따라 가는 순간 순간이 소중한 추억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국물을 떠먹으며 나누던 이야기, 잔치국수가 주는 푸근한 온기와 함께 어울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잔치국수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내 마음을 감싸는 따뜻한 소울 푸드이다. 그 과수원 길의 긴 여운처럼, 나의 추억도 깊고 아름답게 이어진다. 

지금도 김장김치가 물리는 2월이 되면 표고버섯과 멸치와 다시마를 듬뿍 넣고 우려낸 육수를 진하게 끊인다. 표고는 채를 쳐서 간장과 참기름 그리고 깨소금으로, 채 썬 호박도 소금 간으로 파릇하게 볶아낸다. 계란 지단을 부치고 곱게 채를 치고, 이제 소면만 삶으면 된다. 

그래서 인지 나는 이대원의 과수원과 김종학의 꽃 그림을 좋아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강당 로비에 김종학의 야생화와 곤충들이 그려진 300호가 넘는 그림이 있다. 그는 생활고로 이혼을 하고 설악산으로 떠났다. 상처 난 마음을 야생의 자연에서 치유 받았고, 그는 그걸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거친 생명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있다.

김종학, 꽃 잔치, 2003, 캔버스에 유채, 53x73cm, 갤러리 현대

이대원, 농원, 1992, 캔버스에 오일, 112x162cm, 갤러리 현대

이대원의 작품은 크기가 큰 작품일수록 훨씬 더 많은 감동을 준다. 화가의 아버지는 파주에서 과수원을 하셨고, 그는 혜화동 집과 파주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화사한 <농장> 시리즈의 점묘는 과수원의 추억이 뼛속 깊이 새겨진 이만이 그릴 수 있는 꿈틀거리는 생명이 피어난다. 키가 크고 사람 좋은 이대원은 반도화랑을 운영했고, 현대 화랑의 박명자는 그곳에서 일을 배웠다.

빈센트 반 고흐, 분홍 복숭아 나무(모베에게 준 기념품), 1888년3월30일경, 크롤뢰 뮐러 미술관(1918년 안톤과 헬렌이 구입) 

만약 빈센트 반 고흐가 네덜란드에 머물렀다면, 그의 작품은 모베나 렘브란트의 전통적인 색채를 유지하며 현재와 같은 대중적 사랑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빛과 색채를 찾아 여행을 떠났고, 그 선택이 오늘날 그를 독창적인 화가로 기억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88년 봄, 대표적인 과일나무 연작 중 하나인 〈분홍 복숭아 나무〉를 완성하였다. 바로 그날, 빈센트는 안톤 모베가 세상을 떠났다는 여동생의 편지를 받게 된다.

모베는 헤이그 화파의 중요 인물이었다. 빈센트가 뒤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데생과 수채화, 그리고 유화 기법을 지도해 준 멘토였다. 또한 그의 도움으로 빈센트가 헤이그에서 첫 아틀리에를 마련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모베의 죽음을 애도하며, 빈센트는 〈분홍 복숭아 나무〉의 왼쪽에 "모베의 추억, 빈센트"라고 서명을 남겼다. 이 그림에 테오의 이름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다. 

빈센트는 연작의 첫 번째 버전을 모베에게 헌정하며, 그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모베의 미망인이 된 조카 제트에게 그림을 주면서 그는 단순한 화가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적인 애정과 존경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과일나무가 만개한 풍경 속에서도, 빈센트의 그림에는 감정과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빛과 색의 탐구자였던 그에게 있어,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연결고리였다.

특히 반 고흐 미술관의 두 번째 버전에서는 구름이 사라지고 푸른색이 강조되면서, 더 선명한 자연의 대비가 돋보인다. 담장 아래 푸른 풀 역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고, 서명마저 전체적인 색조와 조화를 이루도록 고려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빈센트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조카 제트에게 그림을 선물하며 봄과 재생의 의미를 담았다는 점도 감동적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조차 자연의 순환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는 점에서 빈센트의 철학적 깊이가 느껴진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작가의 말> 

오는 8월11일 하나투어에서 제가 도슨트로 '11박 13일의 유럽 예술여행'을 떠납니다. 이 여행에서 찾아가는 네덜란드는 오랜 미술사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거장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는 바흐처럼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감동을 선사하는 화가들입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 야경,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인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서 그의 대표작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야경>은 단순한 집단초상화가 아니라, 빛과 구도를 통해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걸작입니다.

특히 빈센트가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며 감탄한 <유대인 신부>는 감정을 형상화 하는 렘브란트의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빈센트는 이 그림 앞에서 빵만 먹으며 이 주일을 보내게 해준다면 10년과도 바꾸겠다고 했을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암스테르담국립박물관

유럽에는 크고 유명한 미술관들이 많지만, 네덜란드 헤이그에 자리한 마우리츠하위스만큼 아담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곳은 드뭅니다. 마우리츠하위스는 단순한 미술관이 아닙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정수를 그대로 간직한, 시대를 초월하는 보석 같은 공간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이곳에 발을 들이면 가장 먼저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톨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이 눈에 들어옵니다. 당시 25세였던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했습니다.

생생한 현실감을 가진 이 그림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줍니다. 붓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 마치 우리가 그 장면 속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마우리츠하위스 

하지만 마우리츠하위스의 진짜 백미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입니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이 작품은 관객을 순식간에 마법 같은 순간으로 끌어들입니다. 어두운 배경에서 살짝 몸을 돌린 소녀가 우리를 응시하는 모습은 단순한 초상이 아닌, 시간과 감정을 초월하는 시선의 교류입니다.

그 외에도 야코프 루이스달, 얀 스테인, 프란스 할스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들의 붓질 하나하나가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사회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미술관을 찾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역사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작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예술의 세계, 그것이 바로 마우리츠하위스가 가진 진정한 힘입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의 풍경, 마우리츠하위스 

밝고 빛나는 햇빛을 화폭에 고정시킨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입니다. 그의 풍경화 <델프트의 풍경>, <골목길>은 17세기의 도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아늑함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엄(국립 박물관)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는 그의 섬세한 빛 표현과 정지된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입니다. 

페르메이르의 델프트는 마치 시간을 초월한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붓끝에서 포착된 햇빛과 그림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거리와 운하에 스며 있는 듯하죠. 호이카더 거리 앞의 물결과 플라밍 거리의 고즈넉한 골목길을 직접 거닐며 17세기의 공기와 색채를 상상하는 건 경이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델프트의 루카 길드, 현재는 페르메이르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정적과 사유의 깊이를 직접 마주하며, 델프트라는 도시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시선과 철학이 깃든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을 통해 시대를 건너고, 예술가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시간 여행입니다.

이렇듯 네덜란드의 거장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전합니다. 암스테르담, 델프트, 헤이그, 하를렘을 여행하며 그들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은 단순한 미술 감상을 넘어,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순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