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주, 북한 시장경제를 이끄는 주역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돈주, 북한 시장경제를 이끄는 주역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기사승인 2025-07-18 14:04:00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1. 북한 시장경제를 이끄는 실질적인 주역


1990년대 중반, 북한 땅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 희망의 상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국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었고, 배급은 멈췄으며, 공장과 기업소, 상점과 식당, 버스사업소, 약국 등 일상과 삶의 터전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한숨과 절망이 가득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이름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다. 국가가 손을 놓은 자리에, 개인의 생존 본능과 혁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장마당에 나가 작은 물건을 팔았고, 누군가는 남몰래 쌀을 사고팔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그 속에서, 더 큰 자본과 모험심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돈주(錢主)’이다. 그들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다. 멈춰 선 공장에 자본을 넣어 다시 기계를 돌리고, 텅 빈 상점에 물건을 채워 넣었으며, 무너진 서비스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돈주들은 북한 경제의 숨통을 틔운 신흥 자본가 세력으로,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질서를 북한 사회에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심기 시작했다.

오늘날 북한의 경제를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돈주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기회를 찾았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었다. 이제 돈주들은 북한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실질적 주역이자, 변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북한 경제에 돈주들이 투자하는 다양한 분야

최근 북한 경제는 공식적인 사회주의 시스템 이면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돈주로 불리는 신흥 부유층이 있다. 이들은 사금융, 제조업, 건설, 서비스업, 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본을 공급하며, 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민간 자본의 확대를 이끌고 있다. 

● 사(私)금융과 대부업무

북한에서는 공식 금융기관의 자금 부족과 경직된 거래 관행 때문에 사금융과 고리대금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돈주’라고 불리는 신흥 부유층이 사금융 시장을 주도하면서, 주민들의 예금이나 대출, 물자 대금 결제 등 실질적인 금융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고리대금업은 연 이자율이 50~60%에 이를 정도로 고율의 이자가 일반적이다. 돈을 빌릴 때는 오토바이, 냉장고, 집 등 다양한 실물 자산이 담보로 활용되고, 채무를 갚지 못할 경우 경찰이나 정부 관료가 개입하는 사례도 있다. 돈주들은 전당포 운영, 아파트 건설, 국가사업 투자 등 여러 분야에 자금을 공급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다.

농촌이나 어촌에서도 돈주들이 소규모 자금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갚게 하는 등, 남한의 농협이나 수협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은 북한 법상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 최근에는 북한 당국이 ‘대부법’을 제정해 불법 사금융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사금융 시장의 확대는 북한 경제의 흐름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사회주의 금융 시스템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 공장, 기업소 재가동 및 민관 파트너십

북한의 돈주들은 국영기업의 명의를 빌리거나 국가 소유 건물을 임대해 직접 사업체를 운영한다. 이들은 고난의 행군 이후 멈춘 공장과 기업소에 자본을 투입해 생산을 재개시키고, 국유기업과의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활성화하는 주체다.

돈주는 국영기업의 설비와 노동력을 활용해 자본을 투입하고, 국영기업 명의로 제품을 생산하거나 운영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현물로 받는 등 금융자본의 역할도 하고 있다. 국가 명의를 활용하기 때문에 돈주의 활동은 일정 부분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다. 원자재 조달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에 돈주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국영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자본주의적 민관 협력과 유사한 형태로, 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민간 자본의 확대를 보여주는 사례다.

대표적인 예로 중앙당 조직부 산하 대성담배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고난의 행군 시기 가동이 중단되었으나, 20명의 돈주가 각 50만 달러씩 합작 투자해 재가동에 성공했다. 싱가포르에서 원재료를 수입해 생산한 담배는 10%가 공장 지분으로, 90%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현금과 유사한 기능을 하거나 뇌물로도 사용됐다. 이는 국가 소유 시설과 민간 자본의 협력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대표적 성공 사례다.

● 주택 및 국가 건설사업 투자

북한에서 돈주(신흥 부유층)의 건설사업 투자는 최근 들어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돈주가 직접 투자 기회를 찾아다녔으나, 이제는 국가기관이나 건설 단위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주를 먼저 찾아가 투자 계약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돈주는 아파트나 상가 등 대형 건설사업에 자금을 투입하고, 완공 후에는 일정 부분의 분양권(대여권) 등 실질적인 이익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구조에서 국가는 건축물을 정치 선전이나 경제성과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돈주는 투자금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돈주의 자본력은 북한 경제, 특히 건설·제조·서비스업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국가기관이 돈주에게 투자를 요청하는 구조로 변화하면서 돈주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하지만 돈주의 투자는 공식적으로 국가 소유 사업에 참여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재산권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커질 경우 당국의 견제 대상이 될 수 있다.

돈주의 활약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사금융 활성화, 그리고 신흥 부유층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주는 여전히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며, 자본가로서의 완전한 독립성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돈주와 국가는 대형 건설사업을 매개로 상호 협력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국가의 통제와 재산권 보장 문제 등 여러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 서비스업, 상점, 식당, 교통 투자

북한의 돈주들은 최근 평양, 신의주, 함흥 등 주요 도시에 다양한 음식점과 상점을 열고 있다. 일부 식당에서는 중국, 일본, 서양 음식 등 외국식 메뉴도 선보이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세우는 곳도 늘고 있다. 슈퍼마켓, 편의점, 잡화점 등 여러 소매점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필요한 생필품을 더욱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약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현실에서 돈주가 운영하는 약국은 주민 건강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용실과 사설 병원 등 미용과 건강을 다루는 다양한 서비스업에도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은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자생적 시장화로 인한 교통(시외버스와 기차)의 발달에도 돈주들의 투자가 이루어져 자생적 물류체계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서비스업이 확대되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고, 주민들의 소득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가 다양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생활의 질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경쟁이 생기면서 가격이 안정되고, 공급망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생활이 한층 편리해졌고, 외식이나 미용 등 새로운 소비문화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약국과 병원 등 보건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주민들의 건강과 위생 수준도 나아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돈주들의 서비스업 투자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시장경제 활성화와 생활 수준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모든 지역과 계층에 고르게 미치지는 않아, 제도적 한계와 불평등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 IT, 신산업 투자

최근 북한 내 돈주(신흥 자본가)들이 IT 산업과 신산업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과거에는 주로 유통, 식품 등 전통 산업에 집중했던 돈주들이 이제는 첨단 기술과 신산업 분야로 투자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북한 MZ세대의 등장이 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휴대전화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휴대전화 액세서리, 모바일 서비스 등 관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돈주들은 휴대전화 판매, 액세서리 유통, 수리 서비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IT 및 신산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사회의 소비 트렌드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과거에는 생필품 소비가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정보기술 제품과 전자기기 등 첨단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돈주들은 이러한 변화에 맞춰 신기술, 전자제품, IT 서비스 등 신산업 분야를 주요 투자처로 삼고 있다.

특히 휴대전화와 관련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충전기, 케이스, 이어폰 등 부가 상품 시장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돈주들은 이러한 트렌드를 선도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돈주 자본은 북한 내 시장 확대와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돈주들은 북한 경제의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활약은 사금융 활성화, 기업소 재가동, 건설·서비스업 성장, 신산업 진출 등 경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물론 국가의 통제와 법적 불안정성이라는 한계도 존재하지만, 돈주들의 등장은 북한 사회 내부에서 시장 경제적 요소와 민간 자본의 힘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으로 북한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주민 생활의 질적 향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3. 북한 시장경제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돈주

북한의 돈주는 절망의 땅에서 피어난 기적의 씨앗이다. 한때 모든 것이 멈추고 희망마저 사라졌던 그 땅에서, 돈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배급이 끊기고, 공장이 멈추고, 거리마다 절망이 가득할 때, 돈주는 생존을 넘어 변화를 선택한 존재이다. 그들의 자본과 도전 정신, 그리고 국가와의 미묘한 긴장과 협력 속에서 북한 경제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평양의 장마당에는 활기가 넘친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와 늘어나는 상점, 스마트폰을 손에 쥔 젊은이들 속에서 돈주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돈주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주민들의 삶에는 다시 온기가 돌고 있다. 물론 불평등과 갈등, 국가의 통제라는 한계도 분명 존재하지만, 돈주가 없었다면 오늘의 북한 경제는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돈주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핀 존재이다. 그들은 북한 경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고, 변화의 물결을 일으킨 원동력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북한 사회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자, 새로운 희망의 신호탄이다. 변화의 중심에 선 돈주야말로, 앞으로 북한 경제와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가장 강렬한 빛이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곽인옥 교수